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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농구소식

[NBA 레전드 스토리] <11> '흑표범' 하킴 올라주원

by 곰돌원시인 2009.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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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킴 올라주원(Hakeem Abdul Olajuwon) 전 농구선수
출생
1963년 1월 21일 (미국)
신체
213cm, 115kg
학력
휴스턴대학교 학사
데뷔
1984년 휴스턴 로키츠 입단
수상
1996년 NBA 50대 선수 선정
1994년 NBA 최우수선수(MVP)
경력
2008.09 미국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글 - 이승용] blog.naver.com/sundanceguy

곧 열리게 될 2009년 NBA 드래프트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선수는 하심 타빗이다. 15살이 될 때까지 농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타빗은 우연히 보게 된 경기를 계기로 농구를 시작했고, 우연히 참가하게 된 경기를 계기로 미국에 올 수 있게 됐다.

큰 키와 농구 재능 덕분에, 이제 타빗은 아프리카에서의 빈곤한 운명에서 벗어나게 됐다. 올해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5번 픽 안에 들 것으로 예상되는 타빗이기에,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은 시간 문제다. 타빗을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스카우트는 그에게 돈과 명예를 약속하며 미국행을 설득했다.

타빗의 성공이 보장된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타빗의 이야기는 NBA의 한 전설적인 센터와 너무도 비슷하다. 아프리카 태생으로 15살 때 농구를 시작했으며, 대학 때가 되어서 농구 장학생으로 미국 땅을 밟았던 하킴 올라주원이다.

휴스턴, 그리고 로키츠
올라주원이 유학온 대학은 휴스턴 대학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올라주원은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만났다. NBA의 전설적인 선수가 될 올라주원과 드렉슬러를 얻은 휴스턴 대학은 '슬라마 자마'로 불리며 NCAA의 강팀으로 거듭났다.

1984년 올라주원은 대학에 더 남을 것인지 NBA에 진출할 것인지를 두고 심각한 고민을 했다. 올라주원의 고민은 그가 휴스턴에 남아 있고 싶었다는 데서 비롯됐다. 휴스턴에서 대학 생활을 한 올라주원에게 휴스턴은 제2의 고향과 같았다. 그는 NBA에 가서도 휴스턴에서 뛰고 싶었다. 그리고 1984년 드래프트는 휴스턴이 1차 지명권을 획득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해였다.

결국 올라주원은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올라주원과 마이클 조던 등이 대학을 다 마치지 않고 참가했던 이 1984년 드래프트는 아직도 NBA 전문가들과 팬 사이에서 역대 최고의 트래프트로 회자되고 있다. 조던과 올라주원을 비롯해 찰스 바클리, 존 스탁턴 등이 쏟아져 나온 드래프트였다. 하지만 휴스턴이 1차 지명권을 얻는다고 해도 꼭 자기를 지명해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드래프트 당일, 모두의 예상대로 1차 지명권을 얻은 휴스턴에게 관심이 집중됐다. 선택은 2가지로 좁혀졌다. 천재 조던이냐, 아니면 아프리카 특급 올라주원이냐. 휴스턴에 대한 올라주원의 사랑을 알고 있었던 휴스턴은 결국 의리를 택했다. 이에 조던을 남기고 올라주원을 1라운드 1차 지명 선수로 선택했다.

다른 선수도 아닌 조던을 포기한 지명이었지만, 25년이 지난 지금 당시 휴스턴의 휴스턴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마 휴스턴은 다시 25년 전으로 돌아가더라도 미련없이 올라주원을 뽑을 것이다.

The Dream
올라주원의 별명 중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기술인 드림 쉐이크(Dream Shake)에서 파생된 '더 드림'(The Dream)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 별명은 그보다 아프리카 태생으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것에 대한 별명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휴스턴 로키츠에서의 경력은 올라주원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이기도 했지만, 휴스턴 팬들에게도 올라주원의 존재는 분명 '더 드림' 그 자체였다.

데뷔 첫 시즌 올라주원은 20.6점의 평균 득점과 11.9개의 평균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다른 시즌이었다면 신인왕이 되고도 남았을 성적이었지만, 불행은 조던과 같은 시즌에 데뷔했다는 것이었다. 조던이 기록한 28.2점의 평균 득점은 신인으로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성적이었다.

그래도 올라주원이 있었기 때문에 휴스턴은 조던이 황제로 군림했던 시절에 NBA 우승을 맛본 몇 안 되는 팀이 될 수 있었다. 그 우승이 조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시절에 거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2번의 NBA 우승과 1번의 MVP, 12번의 올스타 선정이 선수로서 올라주원이 휴스턴 팬들에게 선사해준 선물이었다.

올라주원이 이끈 93-94시즌 NBA 우승은 휴스턴 로키츠의 27년 역사상 처음으로 거둔 NBA 우승이었다. 올라주원 시절에 차지한 2번의 NBA 우승을 빼면, 휴스턴은 한 번도 NBA 우승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쿼트로 더블
농구에서 두 가지 개인 기록을 두 자릿수 이상 만들면 그것을 '더블 더블'이라고 한다. 더블-더블은 주로 좋은 선수의 평가 기준으로 쓰인다. 좋은 가드라면 어시스트와 득점, 좋은 파워 포워드나 센터는 리바운드와 득점에서 평균으로 더블-더블을 기록해준다. '트리플 더블'은 3가지 개인 기록을 두 자릿수 이상 기록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평균 기록으로 나오기는 힘들다. 대신 리그 수준급 선수라면 한 시즌에 5~10경기 정도는 트리플 더블을 기록해준다.

'쿼트로 더블'은 말 그대로 4가지 개인 기록에서 두 자릿수를 기록한 것을 의미한다. NBA 역사상 쿼트로 더블을 기록한 선수는 4명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 연장 없는 시합에서 기록한 선수는 단 3명 뿐이다. 올라주원은 1990년 3월29일 밀워키 벅스를 상대로 이 쿼트로 더블을 기록했었다.

올라주원이 역사상 최고의 센터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유는 쿼트로 더블을 기록할 정도로 모든 부문에서 수준급 이상의 실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8시즌을 뛰면서 평균 21.8득점과 11.1리바운드를 기록한 올라주원의 득점력과 리바운드 능력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가 NBA 역대 통산 가로채기 9위, 블럭슛 1위에 올라 있는 최고 수준의 수비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블럭슛이야 센터이니 그렇다 해도, 센터라는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통산 가로채기 9위에 올랐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실제로 역대 10위 내에 들어있는 선수 중 가드 포지션이 아닌 선수는 올라주원 1명 뿐이다(칼 말론은 11위). 이는 그가 얼마나 민첩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는 센터였는지를 증명해준다.

그는 NBA 역사상 한 시즌에 블럭슛과 가로채기를 200개 이상씩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며, 한 시즌에 'MVP-파이널 MVP-올해의 수비수'를 모두 수상한 유일한 선수다. MVP가 보통 공격적 공헌도가 높은 선수에게 유리한 상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MVP와 수비상의 동시 석권이 어떤 의미인지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는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이상적인 센터의 모습을 보여준 것일 수도 있다.

나이지리아의 흑표범
영어, 나이지리아어, 불어, 아랍어가 모두 가능한 올라주원은 언제나 자신의 뿌리가 아프리카임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모슬림의 종교적 가르침에 누구보다 충실하게 따랐다. 비록 1993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애틀란타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그의 뿌리는 언제나 아프리카였다.

그는 또 유명 브랜드와 계약을 하지 않은 스타 선수였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들은 스타 선수의 이름을 따서 판매되는 유명 브랜드의 신발들이 너무 갖고 싶지만 돈이 없을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그 아이들로 하여금 나쁜 길로 빠지도록 유도하는 일이였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100달러가 넘는 농구화 대신에 35달러짜리 농구화에 자신의 이름을 넣는 것을 허락했다.

15살까지 농구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아프리카 소년은 20년 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것을 뛰어 넘어 미국인들의 드림이 되었다. 그는 대학과의 인연으로 맺어진 휴스턴과의 의리를 NBA 선수가 되어서도 끝까지 지키려 했으며, 자신이 이룬 꿈의 크기 만큼 많은 이들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선수였다.

그는 나이지리아의 꿈이고 휴스턴의 꿈이며, 전 세계 모든 농구 팬들의 꿈이다. 많은 이들을 꿈꾸게 하는 올라주원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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