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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농구소식

[NBA 레전드 스토리] <8> '비운의 천재 가드' 페니 하더웨이

by 곰돌원시인 2009.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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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퍼니 하더웨이(Anfernee Hardaway) 전 농구선수
출생
1971년 7월 18일
신체
201cm, 98kg
학력
멤피스대학교
데뷔
1993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로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 입단
경력
2007.08~2007.12 마이애미 히트
2003 뉴욕 닉스
1999~2003 피닉스 선즈


[글 - 이승용] blog.naver.com/sundanceguy

스타라는 것은, 팬이 많다는 이야기지만 그만큼 안티도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이클 조던도 안티가 있었으며, 르브론 제임스도 안티가 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압도적인 실력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드물게 안티가 없는 스타가 탄생하기도 한다. 축구의 세바스티안 다이슬러라던지, 야구의 마크 프라이어 같은 선수들의 공통점은 안티 없이 많은 팬들에게 고른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부상으로 인해 그 가능성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선수 생활을 사실상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들을 향한 팬들의 안타까운 마음이 지지와 성원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선수가 NBA에 한 명 있다. 그랜트 힐의 이름을 떠올린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제리 스택하우스의 이름을 떠올린 사람도 있겠지만, NBA에서 안티 없이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은 스타는 아마 페니 하더웨이일 것이다.

신인왕을 수상한 것도 아니고, 리그 MVP를 탄 경험도 없으며, 올스타전에도 4번밖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1990년대 NBA를 지켜봤던 팬들이라면 가장 사랑스럽고 멋진 가드로 하더웨이를 꼽을 것이다. 많은 팬들의 가슴 속에, 하더웨이는 여전히 올랜도의 1번으로 남아 있다.

신개념의 가드
모든 포지션을 다 소화할 수 있는 가드에는 이미 매직 존슨이 있었다. 하지만 존슨이 포워드에 가까운 체형을 소유한 가드였다면, 페니는 존슨보다는 조금 작지만 더 날렵한 몸을 가진 가드였다. 키가 201cm였던 페니는 다른 가드들보다 키가 월등히 컸으며, 일반적인 포워드들보다 더 빨랐다.

올랜도에서 데뷔한 첫 시즌. 페니는 슈팅 가드로 시작했지만 시즌 중반 포인트 가드로 전환했다. 데뷔 첫 해에 포지션을 변경하는 쉽지 않은 일을 겪었음에도, 페니의 93-94시즌 성적은 평균득점 16점에 평균 어시스트 6.6개였다. 이 해 올랜도는 창단 5시즌 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큰 키와 빠른 스피드, 그리고 정확한 슈팅 능력까지 갖춘 페니는 팀이 처한 사정에 따라 가드와 포워드 포지션을 넘나들 수 있는 선수였다.

95-96시즌 페니의 인기는 정점에 이르게 되는데, 페니는 가드로서 50%가 넘는 슛 성공률을 보인 것은 물론, 평균 득점 21.7점에 평균 어시스트 7.1개를 기록하면서 MVP 투표에서 3위에 올랐다 비록 4연패로 졌지만, 무엇보다 농구 황제 조던을 상대로 활약했던 동부 파이널에서의 강렬한 인상은 전세계 NBA 팬들의 가슴 속에 페니라는 이름을 새겨놓기에 충분했다.

1996년 나이키는 '릴 페니'(lil' Penny)를 공개했다. 페니와 페니의 인형 버전인 '릴 페니'가 나누는 대화를 위주로 만든 광고 시리즈였는데, 릴 페니 시리즈는 바야흐로 조던의 후계자로 조던에게 지명까지 받은 페니의 인기와 지명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페니 시리즈의 신발 이름은 '에어 조던'을 연상시키는 '에어 페니'였다.

전문가들은 페니를 매직 존슨 이후 매직 존슨에 가장 가까운 전천후 가드로 뽑았다. 또한 가장 유력한 조던의 후계자로 뽑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비운의 #1
1996년 페니는 NBA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선수였다. 애틀랜타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나가 금메달까지 따내면서, 페니의 주가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리고 정점에 오른 그 순간, 비극은 찾아왔다.

96-97시즌은 샤킬 오닐이 레이커스로 떠나고 페니가 홀로서기를 처음으로 시작한 시즌이자, 우리에게 부상을 자주 당하는 선수로 인식된 페니의 고질적 부상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홀로서기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페니는 샤크가 없는 올랜도를 이끌면서 평균 20.5점과 5.6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올랜도를 4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 시즌은 페니가 데뷔 후 처음으로 20경기 이상을 결장한 첫 시즌이기도 했다.

97-98시즌 페니는 부상에 신음하면서 19경기 밖에 뛰지 못했다. 올랜도의 포스트시즌도 무산됐다. 이후 페니의 득점력은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1999년 시즌 시작을 앞두고 페니는 제이슨 키드가 있던 피닉스 선즈로 이적했다. NBA 팬들은 '키드와 페니'라는 역사상 최강 가드진의 탄생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최고의 가드진이라던 'BackCourt 2000'은 페니의 발 부상과 키드의 발목 부상에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둘이 같이 뛴 경기는 45경기에 불과했다. 피닉스는 둘이 같이 뛴 경기에서 33승12패를 기록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기에서는 20승17패에 그쳤다. 그리고 그 시즌이 페니가 한 시즌에 60경기 이상을 선발로 나섰던 마지막 시즌이 됐다.

2000년 이후의 시즌들에서 페니는 부상자명단의 단골 선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페니가 떠난 올랜도에는 '티 맥'이라는 새로운 등번호 1번이 생기게 됐다. 페니는 그렇게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첫 4시즌을 제외한 나머지 10시즌에서, 페니는 단 한 시즌도 부상 없이 시즌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10시즌 동안 우리는 페니라는 이름만으로도 설레여 했고 그를 기대했다.

단 하나의 이렇다할 업적도 남기지 못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의 화려했던 첫 4시즌을 기억하고 있다. 페니는 전설이라는 조건에 부합하지 못하는 선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르브론, 아레나스, 조 존슨 같은 선수들의 기억 속에, 그가 90년대 가장 훌륭했던 가드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다.

페니는 기록보다 더 위대한 기억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그것이 전설로서의 페니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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