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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농구소식

[NBA 레전드 스토리] <7> '100득점의 신화' 윌트 체임벌린

by 곰돌원시인 2009.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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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트 체임벌린(Wilton Norman Chamberlain) 전 농구선수, 전 농구코치
출생-사망
1936년 8월 21일 (미국) - 1999년 10월 12일
신체
216cm, 125kg
데뷔
1959년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입단
경력
1973 ABA 샌디에이고 코치
1968~1973 LA 레이커스 선수
1965~1968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선수
1962~1965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 선수


[글 - 이승용] blog.naver.com/sundanceguy

현대 NBA에서 파워 포워드와 센터의 기준은 20-10이다. 20득점에 10리바운드를 매경기 해줄 수 있다면 정상급 포스트로 평가받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 전 커리어에 걸쳐 30-20을 기록한 선수가 있다. 바로 최고의 농구 선수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 윌트 체임벌린이다.

현대 NBA에서 득점을 상징하는 마이클 조던은 15시즌 중 8시즌에서 평균 30득점을 넘기며 통산 평균 30.1득점을 기록했다. 체임벌린은 14시즌 중 7시즌에서 평균 30득점을 넘겼으며, 평균 50점을 기록한 시즌과 평균 40점을 기록한 시즌이 한 시즌씩 있다. 체임벌린의 통산 평균 득점은 조던과 같은 30.1점이다.

현재 최고의 리바운더는 샤킬 오닐이다. 오닐이 가장 많은 리바운드를 기록한 시즌은 평균 13.2개를 기록한 92-93시즌이었다. 반면 체임벌린은 70-71시즌에18.2개를 기록했는데, 이는 최악의 성적이었다. 체임벌린의 통산 평균 리바운드는 22.9개로 현대 농구에서는 1경기에서도 기록하기 힘든 수치이다.

거물 유망주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이미 키가 6피트11인치에 달했던 체임벌린은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농구선수가 됐다. 졸업할 때가 되자 200여개의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올 정도로 그는 가장 인기 있는 유망주였다.

대학에 입학한 체임벌린은 NCAA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됐다. 그의 큰 키와 농구 실력은 다른 선수들을 절대적으로 압도했다. 이에 상대 팀은 그에게 2명을 붙였다. 하지만 2명으로도 어렵게 되자 결국 3명의 수비수를 붙이게 됐다. 체임벌린은 훗날 대학 시절을 농구가 가장 재미없었던 때라고 회고했다.

체임벌린은 결국 대학 농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NBA에 진출하면서 '왜 나는 대학을 떠났나'라는 글을 잡지에 1만달러를 받고 팔았다. 당시 NBA 선수들의 평균 연봉이 9천달러였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NBA는 대학을 마치지 않은 선수를 드래프트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체임벌린은 NBA 팀에게 바로 드래프트를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체임벌린은 할렘 글로베트로터스라는 팀에 입단했다. 할렘은 초청 경기를 주로 하는 팀이었기 때문에 체임벌린은 구 소련까지 다녀오기도 했었다.

그리고 1959년, 마침내 체임벌린이 NBA 드래프트에 나왔다. 체임벌린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필라델피아 워리어스는 체임벌린이 캔사스대학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필라델피아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지역 지명제'라는 것까지 만들어 체임벌린을 얻는데 성공했다(그 당시 NBA는 지금과는 다르게 출신 대학의 지역을 지명의 우선순위로 삼았었다). NBA에서 지역 지명제가 사용된 경우는 체임벌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필라델피아와 계약한 체임벌린은 신인임에도 NBA에서 가장 돈을 많이 받는 선수가 됐다. 58-59시즌 최고 연봉자는 2만5000달러를 받은 보스턴 셀틱스의 밥 쿠지였다다. 하지만 59-60시즌 신인이었던 체임벌린의 연봉은 3만달러였다.

100득점
NBA에 등장한 체임벌린은 말 그대로 '골리앗'이었다. 데뷔 첫 시즌 37.6점의 평균 득점과 27개의 평균 리바운드를 기록한 그의 등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첫 해 올스타전 MVP와 신인왕에 올랐고 퍼스트 팀에 선정되며 모든 NBA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3년째 시즌인 61-62시즌. 지금까지도 자주 회자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다. 1962년 3월2일 뉴욕 닉스와의 홈경기에서, 체임벌린은 1경기 100득점이라는 새로운 NBA의 역사를 썼다. 체임벌린은 경기 종료 7분51초를 남겨둔 상황에서 79점을 득점한 상태였다. 100점을 채우기 위해서는 남은 8분여 동안 한 선수의 한 경기 평균 득점과 맞먹는 21점을 올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닉스는 한 선수에게 100점을 허용하는 망신을 피하기 위해 체임벌린이 아닌 다른 선수들에게 계속해서 파울을 하는 등의 편법을 썼다. 그럼에도 체임벌린은 경기 종료 2분45초를 앞두고 94점에 도달했다. 그리고 종료 46초를 남긴 상황에서 체임벌린은 5명의 수비수들을 모두 따돌리고 앨리우프 덩크를 성공시키면서 기어코 100득점에 성공했다.

이 100득점은 47년이 지난 지금에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100득점에 성공했던 이 시즌, 체임벌린은 80경기에 출장해서 평균 득점 50.4점이라는 근접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대기록을 세웠다.

골리앗
라이벌이었던 빌 러셀에 막혀서 번번히 NBA 타이틀을 놓쳤던 체임벌린은, 마침내 66-67시즌 그토록 염원했던 NBA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그 후 14시즌을 뛰는 동안 그는 2번의 우승과 4번의 MVP를 차지했고 13번 올스타에 선정되며 최고의 센터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뛰었던 시대의 자료들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마이클 조던이나 매직 존슨의 화려한 플레이를 다시 볼 수 있지만, 체임벌린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는 우리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종이 위의 기록들을 추적하면서 그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였을지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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