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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농구소식

[NBA 레전드 스토리] <12> '못 다 피운 재능' 크리스 웨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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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웨버(Mayce Edward Christopher Webber III) 전 농구선수
출생
1973년 3월 1일 (미국)
신체
208cm, 111kg
학력
미시간대학교
데뷔
1993년 올랜도 매직 입단
수상
1993년 NBA 올해의 신인상
경력
2008.03 현역 은퇴
사이트
공식사이트

[글 - 이승용] blog.naver.com/sundanceguy

1992년 초 미국 대학농구 NCAA 토너먼트가 한창 일 때, 미국의 농구 팬들은 일대 충격에 빠지게 된다. 당시는 3학년이 되기 전에 팀의 주전이 되는 것조차 힘든 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1973년생 신입생 5명으로 이뤄진 미시건 대학이 다른 대학들을 물리치고 '파이널 4'에 올라왔던 것이다.

모든 신문들은 앞다투어 이들을 소개했다. F4가 아닌 F5의 탄생이었다. 'Fab-5'는 요즘으로 따지면 인기 검색어가 되어버렸다. 크리스 웨버, 주안 하워드, 잘렌 로즈, 지미 킹, 레이 잭슨이 바로 Fab-5의 구성원이었다.

이 Fab-5의 중심은 단연 크리스 웨버였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 전미 최고 선수상을 수상했던 웨버는 미시건 대학에 와서도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웨버가 중심이 된 Fab-5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93년에 열린 NCAA 토너먼트에서도 팀을 2년 연속 결승전까지 진출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웨버라는 이름이 NBA 팬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스캔들
선수 생활 내내 웨버만큼 많은 스캔들과 염문설을 뿌리고 다닌 선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웨버의 여러 스캔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1993년 NCAA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일어난 사건일 것이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과 만났던 NCAA 결승. 경기 종료 11초를 남겨두고 미시건 대학이 73-71으로 2점 뒤져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웨버가 공을 잡았다. 웨버가 2점을 11초 안에 넣을 수 있었다면 경기는 연장으로 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이드 라인에서 공을 잡은 웨버는 상대팀의 더블 팀 수비에 막혔고 결국 작전 타임을 불렀다. 바로 웨버가 평생을 두고 후회한 순간이었다.

당시 미시건 대학은 작전 타임을 이미 다 써버린 상황이었고, 그것을 몰랐던 웨버가 부른 작전 타임으로 인해서 미시건 대학은 테크니컬 파울을 받았다. 테크니컬 파울 후, 점수는 75-71이 되어버렸다.

Fab-5는 물론 2년간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2년 연속 결승 진출을 이루고서도 우승은 하지 못했다. NBA에 온 웨버는 정말 훌륭한 선수였지만, 이상하게도 플레이오프에만 올라가면 실책을 하거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새가슴 웨버'는 1993년 이후 웨버를 항상 따라다닌 단어가 됐다.

웨버가 새크라멘토로 이적한 후 선수로서 정점을 향해 달려갈 즈음, 에드 마틴 스캔들이 터졌다. 이는 미국 대학 농구 역사상 가장 큰 도박 및 금품매매 스캔들로 미국대학농구협회 이외에도 FBI 등이 개입해 수사한 스캔들이었다.

이 스캔들이 터졌을 때, 모두의 주목을 받은 사람은 당시 최고의 NBA 선수로 주목 받던 웨버였다. 웨버와 그의 아버지는 고등학교와 대학 선수 시절 에드 마틴으로부터 약 20만달러가 넘는 금품을 제공받은 혐의를 받았다.

이 사건은 몇 년 후 에드 마틴이 사망하면서 증거 불충분으로 그 시점까지의 수사만으로 종결되게 됐고, 웨버의 혐의도 기각됐다. 하지만 이 스캔들은 많은 팬들로 하여금 웨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NCAA는 웨버가 대학 시절 수상한 모든 개인 기록을 말소했으며, 그 시절 미시건 대학이 이룬 성적에 대해서도 비공식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새크라멘토
1993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올랜도는 웨버를 1라운드 1차 지명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골든스테이트는 페니 하더웨이를 1라운드 3차 지명으로 선택했다. 드래프트가 끝나자마자 올랜도는 웨버를 골든스테이트로 보내면서 하더웨이와 향후 1라운드 지명권 3장을 받았다. 웨버와 하더웨이의 운명이 뒤바뀐 순간이었다.

데뷔 첫 해 웨버는 평균 17.5득점과 9.1개의 리바운드로 어렵지 않게 신인왕을 수상했다. 그리고 골든스테이트를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자 감독인 돈 넬슨과의 불화로 워싱턴으로 트레이드됐다. 웨버가 떠난 후 골든스테이트가 다시 플레이오프에 등장한 것은 13년 후였다. 워싱턴으로 트레이드된 웨버는 96-97시즌에 워싱턴을 9년 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웨버가 떠난 후 워싱턴이 다시 플레이오프에 나가기까지는 8년이 걸렸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웨버는 새크라멘토의 웨버다. 웨버가 새크라멘토의 웨버가 된 것은 98-99시즌부터였는데, 01-02시즌은 새크라멘토 열풍이 전 NBA를 휩쓴 해였다. 웨버, 마이크 비비, 덕 크리스티, 블래디 디박, 페자 스토야코비치로 구성된 주전은 또다른 Fab-5였다. 여기에 바비 잭슨, 히도 터커글루, 스캇 폴라드 같은 선수들이 벤치 멤버였던 새크라멘토는 그 당시 샤크와 코비의 레이커스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팀으로 간주됐다.

실제로 새크라멘토와 레이커스가 만난 서부 결승은 사실상 NBA 파이널이었다. 7경기 중 5경기가 6점 내에서 결정된 대접전 끝에 레이커스가 새크라멘토를 4승 3패로 누르고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그리고 열린 NBA 파이널은 너무나 심심했다. 웨버가 우승을 경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기회는 그렇게 사라졌다.

웨버가 새크라멘토에서 지낸 6.5시즌 동안 새크라멘토는 NBA에서 가장 신나는 농구를 하는 팀이었으며, 새크라멘토의 홈구장인 아코 센터는 원정 팀들의 무덤으로 불릴 정도로 홈 팀의 승률이 높았던 곳이었다. 플레이오프가 되면 홈 관중들이 종을 들고와서 상대팀 작전 타임에 종을 울리면서 큰 소음을 만들어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것은 유명했다.

신인왕, 5번의 올스타전 출장, 1번의 리바운드 1위 그리고 20.7점의 평균 득점과 9.8개의 평균 리바운드는 못했다고 할 수 없는 성적이다. 그는 ESPN이나 SLAM에서 뽑은 가장 위대한 농구 선수 75인 안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여러 염문설이나 여러 스캔들 없이 농구에만 전념했다면 좀더 역사에 남을 선수가 됐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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