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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농구소식

[NBA 레전드 스토리] <4> '위대한 조력자' 마크 잭슨

by 곰돌원시인 2009.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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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승용] blog.naver.com/sundanceguy

2009년 3월1일, 제이슨 키드는 토론토전 홈경기에서 15어시스트를 기록, 1만 어시스트를 돌파한 역대 4번째 선수가 됐다. 그리고 2009년 4월5일 피닉스전 홈경기에서의 20어시스트로 매직 존슨(1만141개)을 넘어 역대 3위에 올랐다.

키드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키드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 경기를 중계석에서 중계한 한 은퇴 선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키드가 존슨과 동률을 이루고 존슨을 넘어서자, 중계 팀은 화면에 통산 어시스트 순위를 띄웠다. 그리고 중계석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저는 내년에도 이 자리에 앉아서 키드가 제 이름을 한 계단 밑으로 밀어내는 걸 바라보면서 축하해줘야 하겠네요" 해설자 마크 잭슨이었다.

NBA와 ABA의 역사를 합쳐 1만 어시스트를 달성한 선수는 총 4명, 그 중 존 스탁턴, 제이슨 키드, 매직 존슨의 이름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2위에 올라 있는 마크 잭슨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자란 잭슨은 1987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8번째 픽으로 고향 팀 닉스에게 지명됐다. 샌안토니오가 해군 사관학교 생도인 데이비드 로빈슨을 지명한 그 해였다. 잭슨은 평균 13.6득점, 10.6어시스트를 기록, 해군 복무 때문에 NBA에 바로 합류하지 못한 로빈슨 대신 신인왕을 차지했다. 이는 통산 어시스트 2위 잭슨이 받은 유일한 상이었다.

87-88시즌은 닉스가 전 시즌보다 14승을 더 거두면서 4시즌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시즌이다. 하지만 닉스는 유잉의 팀이었다. 누구도 닉스를 잭슨의 팀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 후 잭슨은 인디애나로 이적했다. 하지만 인디애나도 레지 밀러의 팀이었을 뿐이었다. 잭슨의 대한 평가는 아무리 높아봐야 밀러의 사이드 킥 정도였다.

역사상 세번째 1만 어시스트를 달성한 시즌 역시 그가 유타에서 통산 어시스트 1위인 스탁턴의 백업 선수로 뛰던 02-03시즌이었다. 2003년 1월8일 피닉스전 홈경기에서 1만 어시스트라를 돌파한 잭슨은 3월16일 클리블랜드전 원정경기에서 존슨을 넘어섰다. 하지만, 2경기 모두 스탁턴의 교체선수로 출장해 각각 19분, 17분밖에 뛰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항상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선수였다.

위대한 조력자
비록 유잉에 가려서 아무런 조명도 받지 못했지만, 닉스가 4시즌 만에 플레이오프에 다시 진출한 시즌은 잭슨에 데뷔한 87-88시즌이다. 또한 래리 브라운이라는 명장에 가려서 주목 받지 못했지만, LA 클리퍼스가 플레이오프에 2년 연속으로 출전한 시즌도 잭슨이 클리퍼스의 주전 가드였던 시즌이었다.

인디애나가 2년 연속 동부 결승 진출과 NBA 파이널 진출이라는 화려한 성적을 기록했던 1997년에서 2000년까지 3시즌 동안, 인디애나의 주전 포인트 가드는 바로 잭슨이었다. 밀러와 래리 버드에 가려서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지만, 인디애나의 성공에는 잭슨의 공도 결코 적지 않았다.

00-01시즌은 토론토 랩터스의 프랜차이즈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2라운드 진출에 성공한 해이다. 토론토가 14년의 프랜차이즈 역사를 통털어 가장 좋은 시즌 성적(47승)과 가장 좋은 플레이오프 성적(2라운드 진출)을 거둔 이 시즌 토론토의 주전 포인트 가드는 잭슨이었다. 물론 빈스 카터의 매력에 푹 빠진 언론은 잭슨에게 관짐조차 두지 않았다.

물론 유잉, 밀러, 카터는 훌륭한 선수들이다. 그들의 뒤에는 그들을 돕고 있는 잭슨이 있었다. NBA에서 17시즌을 뛰는 동안 잭슨은 무려 14번이나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17시즌 동안 7팀을 9번 옮겨다니는 와중에도 11시즌에서 어시스트 상위 1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끊임없이 바뀌고 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꾸준하게 자신의 몫을 다해주었던 것이다.

신인상과 1989년 한 번의 올스타전 출장을 제외하고는 잭슨은 단 1개의 개인상도 수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산 어시스트 2위와 통산 경기 출장 10위에는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누구보다 주목받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많은 시합에 출장했고, 누구보다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는 항상 그자리에 있었다.

평가의 기준
잭슨은 아직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헌액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의견이 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는 가장 큰 이유는 거의 2시즌마다 옮겨다닌 팀 이동이다. 여기에 그가 뛴 1296경기 중에서 선발로 출장한 시합이 1091경기뿐이라는 것도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그의 흠집 중 하나다. 거의 20%의 경기를 잭슨은 주전이 아닌 후보로 뛰었던 것이다.

그는 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빛나는 슈퍼스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한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팀에서 탐나는 선수가 생기거나 재정적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처리 대상에 오르는 선수였다.

하지만 유잉의 닉스가 잭슨의 합류 후 첫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것, 밀러의 인디애나가 잭슨의 합류 후 가장 화려한 3시즌을 보낸 것, 카터의 토론토가 잭슨이 있던 해에 프랜차이즈 최다승을 기록한 것, 스탁턴의 시계가 멈춰버린 02-03시즌, 30분도 뛰지 못하는 스탁턴을 벤치에서 도왔던 선수가 잭슨이었다는 점은 비단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쇠고기와 뼈를 삶아서 뜨끈하게 뚝배기에 담아내면 우리는 그것을 설렁탕이라고 한다. 얼마나 좋은 고기, 얼마나 좋은 뼈, 얼마나 좋은 뚝배기를 사용했는가의 여부는 그 설렁탕의 품질과 값을 결정짓는다고 한다.

하지만 설렁탕의 맛을 완성시키는 것은 최고급 한우도 아니고 장인의 손에서 만들어진 최상품의 뚝배기도 아닌 누구나가 쉽게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소금 한 숟가락이다. 그것이 바로 잭슨의 가치이다.

소금이 들어가기 전까지 설렁탕이 설렁탕이 아닌 것처럼, 최고의 슈퍼스타가 있고, 훌륭한 감독이 있는 팀이라도 잭슨이라는 소금이 그 팀의 마지막 간을 해주고 난 뒤에야 하나의 훌륭한 팀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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