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트릭 유잉(Patrick Aloysius Ewing) 농구코치, 전 농구선수
- 출생
- 1962년 8월 5일 (자메이카)
- 신체
- 213cm, 115kg
- 소속
- 올랜도 매직 (어시스턴트 코치)
- 가족
- 아들 패트릭 유잉 주니어
- 학력
- 조지타운대학교 학사
- 경력
- 2008.09 미국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7.07 올랜도 매직 어시스턴트 코치
[글 - 이승용] blog.naver.com/sundanceguy
81-82시즌 NCAA 결승. 명문 노스캐롤라이나대학과 조지타운대학이 만났다. 두 대학이 결승에서 만난 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지만, 이들을 결승에 올려 놓은 선수가 신입생들이라는 것은 미국 전역을 술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노스캐롤라이나를 이끌고 결승에 선착한 신입생은 마이클 조던이었고, 조지타운을 데리고 결승에 올라온 신입생은 바로 패트릭 유잉이었다. 이 시합은 조던의 결승 골로 노스캐롤라이나의 우승으로 끝났다. 2년 뒤, 83-84시즌에서 3학년이 된 유잉은 조지타운대를 정상에 올리며 2년 전의 설움을 갚는다. 그리고 유잉이 대학 정상에 오른 그 해, 조던은 NBA 진출을 선언했다.
유잉은 졸업을 1년 앞두고 프로 전향을 선언한 조던과 달리, 4학년을 모두 마친 1985년 NBA에 진출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84-85시즌 신인왕은 조던, 그 다음 시즌 신인왕은 유잉이었다. 80년대 말과 90년대를 보내며 두 선수는 함께 성장했고, 플레이오프에서 5번이나 마주치는 얄굳은 인연을 이어갔다.
조던이 첫 우승을 거둔 90-91시즌. 조던과 시카고 불스의 첫 제물은 유잉의 뉴욕 닉스였다. 닉스를 1라운드에서 3연승으로 격침시킨 조던과 불스는 그 기세를 그대로 몰아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에도 두 팀은 2라운드 동부 4강에서 만났다. 그리고 4승3패로 불스가 또 승리했다. 결국 불스는 리그 2연패에 성공했다. 그 해 불스에게 3승 이상을 거둔 팀은 닉스가 유일했다. 92-93시즌 닉스는 다시 동부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는 어김없이 조던의 불스였다. 이번에도 불스의 4승2패 승리. 불스는 리그 3연패를 이뤄냈다. 불스가 3연패에 성공한 이 시기에 포스트시즌에서 3년 연속으로 불스와 만난 팀은 닉스뿐이었다.
그리고 2년 뒤, 돌아온 조던이 다시 NBA 우승을 만들어낸 이 시즌에도 어김없이 유잉과 닉스는 플레이오프에서 조던과 불스를 만나 패했다. 유잉에게 조던은 대학 시절부터 우승 문턱에서 항상 마주쳐야만 했던 악연 아닌 악연이었다.
기적의 팀
유잉은 1985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번으로 닉스에 지명됐다. 그 후 시애틀로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유잉은 85-86시즌부터 99-00시즌까지 15시즌 동안 닉스의 상징으로 팀을 이끌었다. 유잉이 있던 15시즌 동안 닉스는 13차례 플레이오프 진출했다. 하지만 그가 떠난 후에는 9시즌 동안 2번에 그치고 있다.
사실 조던의 라이벌이라는 사실보다도, <슬램 덩크> 고릴라 덩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보다도, 유잉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장면은 '기적의 플레이오프'라 불리는 98-99시즌 플레이오프다.
선수 노조의 파업으로 단축 시즌을 보낸 그 시즌에서 닉스는 27승23패를 기록, 동부 8위로 플레이오프에 간신히 턱걸이 했다. 전 시즌에서 팔목 부상을 당했던 유잉은 98-99시즌에서도 치명적인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했다. 그런 닉스의 승리를 예상한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났다. 마이애미에서 벌어진 첫 경기에서 출장조차 의심스러웠던 유잉은 무려 32분을 뛰면서 친구인 알론조 모닝과 은사인 팻 라일리가 있는 마이애미를 격침시켰다. 무릎과 아킬레스건 통증으로 공격에 가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유잉은 9득점에 그쳤지만, 15리바운드와 4개의 블럭샷을 성공시키며 닉스의 골밑을 완벽히 지켰다. 유잉은 다시 5차전에서 5경기 연속 출전도 모자라 무려 40분을 소화하며 22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 닉스가 역사상 1번 시드 팀을 격파한 역대 2번째 8번 시드 팀이 될 수 있게 했다.
이어진 2라운드에서 유잉과 닉스는 마치 신들린 것처럼 4전전승으로 애틀랜타를 물리쳤다. 유잉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신력을 보여주며 마치 아무런 부상도 없는 것처럼 활약했다. 동부 결승에 진출한 역사상 최악의 팀에 전 세계의 농구 팬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동부 결승에서 만난 팀은 인디애나. 인디애나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40분이나 출전한 유잉은 '왜 아무도 말리지 않느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처절했다. 무릎과 아킬레스건 상태가 심각해 센터이면서도 슛 성공률은 30%에 간신히 턱걸이했을 정도였고, 공격 리바운드가 하나도 없었을 정도로 공격 가담 능력 또한 처참했다. 하지만 유잉은 수비에서 만큼은 넘을 수 없는 산이 되어 버티고 또 버텼다. 그리고 닉스는 기적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결국 2차전에서, 이미 한계점을 지난 유잉의 무릎과 아킬레스건에 빨간불이 켜지고 말았다. 경기 종료 2초를 남기고 2점을 뒤진 닉스는 유잉에게 찬스를 만들어 줬지만, 하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유잉은 단지 상체와 팔의 힘 만으로 슛을 던졌다. 그리고 슛은 빗나갔다. 닉스 팬들은 패했다는 사실보다 유잉을 잃었다는 사실이 더 슬펐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버틴 유잉의 투혼을 목격한 닉스 선수들은 그렇게 물러나지 않았다. 6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인디애나를 4승2패로 꺾은 것. 닉스는 NBA 역사상 처음으로 NBA 결승에 진출한 8번 시드 팀이 됐다.
NBA 결승이 열릴 무렵에는 이미 전 세계의 농구 팬들이 이 기적의 팀을 사랑하게 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유잉이 없는 닉스는 던컨과 로빈슨이 있던 샌안토니오에게 1승4패로 패해 결국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하지만 분명했던 한 가지는, 98-99시즌 모든 농구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건은 투혼의 유잉과 기적의 닉스였다는 사실이다.
뉴욕 그리고 농구
말년에 시애틀과 올랜도에서 선수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유잉은 어디까지나 닉스의 선수다. 시애틀로 트레이드된 유잉이 처음으로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방문한 2001년 2월27일, 뉴욕 팬들은 유잉이 소개되자 모두 일어나 그들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선수의 방문을 뜨겁게 환영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3년 2월28일. 유잉의 33번은 닉스의 영구결번이 됐다.
영구결번식에서 자신을 영원한 뉴욕 시민이라고 표현했던 유잉은 코치로서 제 2의 농구 인생을 살고있다. 현재 NBA 최고의 센터로 주목받고 있는 드와이트 하워드의 전담 코치가 바로 유잉이다. 유잉은 뉴욕을 떠났지만, 그의 바람처럼 유잉은 영원한 닉스의 센터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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