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래리 브라운(Lawrence Harvey Brown) 농구감독
- 출생
- 1940년 9월 14일 (미국)
- 신체
- 180cm, 72kg
- 소속
- 샬럿 밥캐츠 (감독)
- 학력
-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학사
- 수상
- 2004년 ESPY 최고 감독상
2004년 NBA 챔피언 결정전 우승 - 경력
- 2008.05 샬럿 밥캐츠 감독
[글 - 이승용] blog.naver.com/sundanceguy
1. 농구 명문 캔사스대학은 1970년대 초반 이후 '파이널 4'에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1986년에 다시 등장, 1988년에는 대학 역사상 2번째 NCAA 우승을 차지했다. 그 후 캔사스대학은 다시 '파이널 4'의 단골 손님이 됐다.
2. LA는 레이커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클리퍼스는 이번 시즌 많은 선수를 영입했지만, 플레이오프와 5할 승률은커녕 20승을 올리는 것조차 힘들어 보인다. 클리퍼스가 1984년 샌디에이고에서 LA로 옮긴 이후 25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것은 단 4번. 5할 이상 승률은 단 3번이었다.
3. 닉스의 텃세에 밀려서 1977년 뉴욕에서 뉴저지로 옮겨온 네츠는 2001년 바이런 스캇과 제이슨 키드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24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 10번 진출했다. 하지만 5할 승률을 넘기고 당당히 진출한 적은 7번뿐이다.
4. 강팀의 대명사가 된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80년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구단 매각과 주요 인사의 퇴임 등으로 우울한 시기를 겪은 적이 있다. 하지만 90년대부터는 메이저리그의 애틀랜타, NFL의 피츠버그와 더불어 가장 많은 지구 우승을 차지한 팀이 됐다.
5. 농구 명가 필라델피아는 1991년 이후 7시즌이나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는 치욕적인 90년대를 보냈다. 하지만 98-99시즌부터는 다시 5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6. 80년대 말 '배드 보이스'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NBA를 초토화했던 디트로이트는 90년대에는 우승컵을 한 번도 들어올리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03-04시즌, 디트로이트는 14시즌 만에 역대 3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7. 1976년 ABA와 NBA의 합병이 이루어진 후, ABA에서 NBA로 넘어간 4팀 중 76-77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팀은 단 2팀. 그 중 지구 우승과 6할 승률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통과한 팀은 덴버 너기츠뿐이었다.
위에 언급된 7팀에는 원래부터 명문인 팀도 있으며, 패자로 더 유명한 팀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위에 언급된 시기에 황금기를 보냈다는 것. 이들의 영광의 시대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름이 하나 있으니, 바로 래리 브라운이다.
브라운은 캔사스대학에 36년 만의 NCAA 우승을 안겼으며, 클리퍼스가 가지고 있는 3번의 5할 승률 중 두 번을 만들어낸 감독이다. 네츠의 첫 5할 시즌과 5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의 기틀을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현재 샌안토니오 왕조의 설계도를 만들어 낸 인물이기도 하다.
필라델피아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브라운이 감독으로 있는 동안 6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반면 지난 6시즌 동안은 3시즌 진출 그쳤다. 덴버가 ABA에서 NBA로 넘어오는 과정에서도 NBA에서 3시즌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면서 강팀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 때도 브라운이 있었다.
이쯤되면 농구계의 흑기사 내지는 '리빌딩 스페셜리스트'라는 이름이 붙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빼곡한 이력서
필 잭슨을 이야기 할 때는 레이커스와 시카고 불스를 이야기하면 90%가 채워진다. 마이클 조던은 노스캐롤라이나대학과 불스 이야기를 하고 나면 거의 끝난다. 하지만 브라운은 그가 몸담았던 거의 모든 팀을 이야기해야 한다.
브라운은 일반인으로도 그리 특별하지 않은 175cm의 키를 가지고 당시 대학 최고의 명문인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 들어가 당당히 '딘 스미스의 아이들'의 일원이 됐다. 선수로서 가장 뛰어난 딘 스미스의 수제자가 마이클 조던이라면 코치로서 가장 뛰어난 수제자는 바로 브라운이다.
대학을 마친 브라운은 키가 작아 NBA에서 뛸 수 없게 되자, 하위 리그 팀을 전전하다 27살이 되서야 ABA의 뉴올리언스 버캐니어를 통해서 전국 무대에 데뷔했다. 여기서 브라운의 선수 시절을 집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는, ABA가 창설되고나서 첫 3시즌 동안 어시스트 1위 선수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이 175cm의 단신 가드는 급기야 68-69시즌 팀을 이끌고 ABA 타이틀을 차지한다. 늦은 데뷔로 5시즌 밖에 뛰지 못했지만, 브라운은 ABA의 역대 어시스트 6위에 올라 있으며, NBA/ABA 통합 순위에서도 270위권에 있다. 정상적인 나이에 데뷔했다면 그의 이름을 30위 내에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5시즌의 선수 생활 후, 감독으로 전향한 브라운은 캐롤라이나 쿠거스라는 팀을 맡아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그리고 덴버 너기츠로 자리를 옮겨 덴버가 ABA에서 NBA로 넘어가는 시기에 5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할 수 있도록 한다(ABA 2시즌, NBA 3시즌).
1972년부터 감독 생활을 시작한 브라운은 40년 남짓되는 시간 동안, 감독으로서 ABA 올해의 감독상 3회, NBA 올해의 감독상 1회, NCAA 올해의 감독상 1회를 수상, ABA NBA NCAA에서 모두 감독상을 수상한 유일한 감독이 됐다. 선수 또는 감독으로서 ABA NBA NCAA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선수로 금메달을 목에 건 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감독으로서 동메달을 목에 걸어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올림픽 메달을 따낸 유일한 농구인이 됐다.
91-92시즌, 브라운은 전반기 샌안토니오에서 21승17패를 기록한 후 후반기에는 클리퍼스를 맡았다. 전반기 22승24패에 그쳤던 클리퍼스는 브라운이 온 후 23승12패를 기록, 45승37패로 프랜차이즈 역사상 첫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어느 스포츠 기록을 뒤져봐도 한 감독이 한 시즌에 2팀을 맡아 2팀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사례는 없다. 적어도 미국 스포츠 역사에는 브라운뿐이다.
영원한 패배자의 끝나지 않은 도전
브라운이 흔하게 듣는 비난은 한 팀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35시즌의 경력 동안 그가 거쳐간 팀은 3개의 대학 팀과 10개의 프로 팀으로 총 13팀에 달한다. 팀당 3시즌도 머물지 못했던 것.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브라운의 잦은 이동은 새로운 도전을 갈망하는 그의 욕구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맡은 13팀 중 그의 재임 기간에 성적 향상을 이루지 못한 팀은 데이비슨대학과 뉴욕 닉스 단 2팀뿐이다. 데이비슨대학이 1972년 여름 트레이닝 캠프에서 잠깐 맡은 것임을 고려하면, 브라운이 실패한 팀은 닉스가 유일하다(데이비슨대학은 브라운이 여름 캠프 감독을 해준 72-73시즌에서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닉스에서의 실패 또한 브라운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스테판 마버리와의 불화와 당시 단장이었던 아이재아 토마스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브라운이 떠난 이후에도 닉스는 구제불능이었으며, 토마스는 강간 미수 및 여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다 결국 팬들에 의해 팀에서 추방됐다. 마버리 또한 팀에서 쫒겨났다.
한 팀에 오래있지 못한다 해도 감독하는 팀마다 정상으로 올려놓는 브라운에게 패배자의 이미지가 있는 것은 그가 떠나는 방식에 있었다.
1988년 캔사스대학이 36년 만에 NCAA 우승을 차지하면서 브라운은 학교의 영웅이 됐다. 하지만 그 해 여름 캔사스대학은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88-89시즌 참가를 금지당했다. NCAA 역사상 우승 팀이 다음 시즌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이에 브라운은 우승 감독이 아닌, 출장 정지를 받게 만든 치욕적인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캔사스대학을 떠났다(징계의 이유는 캔사스대학으로 옮겨올 예정이었던 빈센트 애스큐라는 선수의 비행기표를 대학에서 지불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그의 할머니가 위독해서 그랬던 것임이 밝혀졌다).
샌안토니오와 인디애나 시절에는 각각 팀의 실세인 밥 배스와 래리 버드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주면서 파워 게임에서 패해 도망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필라델피아 시절에도 6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 후에 갑작스레 팀을 떠나게 되면서, 아이버슨과의 세력 대결에서 패한 것으로 많은 이들에게 비춰졌다.
여기에 디트로이트를 2시즌 연속 NBA 파이널에 진출시키면서 2시즌 연속 우승을 노리던 시기에 이미 클리블랜드의 감독직을 수락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의 이미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샌안토니오와의 파이널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브라운은 소문에 대해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샌안토니오가 우승하자 브라운이 일부로 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디트로이트는 한 시즌이 더 남아있던 브라운과의 계약을 서둘러 파기했다. 하지만 브라운은 클리블랜드로 가지 않았다.
캔사스대학 사건도, 디트로이트에서의 소문도, 뉴욕에서의 방황도, 결국은 브라운의 잘못이 모두 아니었다. 아이버슨만해도 이제와서는 브라운만큼 아이버슨을 잘 다룬 감독도 없었다는 것에 모두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건이 터진 시점들에서는 모두의 눈에 브라운은 도망자이자 패배자처럼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기억 속의 브라운은 필 잭슨처럼 압도적이지도, 팻 라일리 처럼 카리스마 넘치지도 않으며 그냥 성격이 까다로운 할아버지로 남아있다.
하지만 브라운은 뉴욕에서의 치욕에도 포기하지 않고 샬럿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가 새로 부임한 올시즌, 샬럿은 이미 팀 최고 기록인 33승을 넘어섰으며 팀 역사상 처음으로 동부에서 10위 이내에 들어갈 예정이다.
수많은 오해를 받았고 부당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이유로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2m가 넘는 NBA의 거구들이 175cm의 백발 노인에게 압도당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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