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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역사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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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어디까지 알고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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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보관된 태극기 중 가장 오래된 ‘데니 태극기’. 고종의 외교고문이었던 데니(Denny)가 소장했던 태극기로 1990년쯤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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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고광순이 일본군과 싸울때 지녔던 ‘불원복 태극기’. 1907년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한국의 국기는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조인식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당시 사용되었던 국기 형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1882년 9월. 고종의 명을 받아 수신사(修信使) 자격으로 일본으로 가던 박영효가 배 위에서 ‘태극·4괘’ 도안의 기(旗)를 만들어 사용했고 본국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다음해인 1883년 3월 고종은 왕명으로 ‘태극·4괘’ 도안의 기를 국기로 제정·공포했다. 하지만 당시 국기제작에 관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아 태극기는 다양한 형태로 제작됐다.

실제로 고종의 외교고문이었던 데니(Owen N. Denny)가 소장했던 태극기(1890년 경)나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했던 태극기(1907) 등 광복 이전의 태극기를 보면 태극의 문양과 괘의 위치가 조금씩 다른 형태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태극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미국 소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1883년 미국 공사 푸트가 조선에 왔을 때 수행했던 주이(Jouy)가 1884년에 입수한 것이다. 이 때문에 ‘주이 태극기’라고도 불린다. 국내에 남아 있는 태극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데니 태극기’이다.

광복 이후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지자 정부는 1949년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해 오늘날의 ‘국기제작법(문교부고시 제2호)’를 확정했다. 1972년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실시했으며, 현재는 2007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법’에 의해 국기에 관한 사무 전반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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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태극기 제작법을 공고한 문교부고시 제2호. |국가기록원 제공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1883년 3월6일 결정된 태극기의 국기(國旗) 제정을 계기로 3월 ‘이달의 기록’ 주제를 “민족의 얼과 염원 담은 태극기의 변천사 한눈에 본다”로 정하고 관련 기록물을 17일부터 누리집(www.archives.go.kr)을 통해 제공한다고 16일 밝혔다.

이번에 제공되는 기록물은 총 45건(동영상 5, 사진 21, 문서 4, 우표·엽서·포스터 6, 유물 9)이다. 기록물들은 태극기의 변천과정과 국경일 및 기념일 등 각종 행사에 사용되었던 태극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번 기록물에는 국가기록원 소장 기록물뿐만 아니라 독립기념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기록물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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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정부가 1944년 발행한 태극기 우표.|국가기록원 제공


특히 서비스 기록물 중 미국정부가 한국인의 독립투쟁 의지를 기념하기 위해 1944년 발행했던 태극기 우표와 광복 1주년을 맞아 발행된 기념우표 및 엽서가 눈에 띈다. 또한 광복 이후 한국 최초의 선거인 5·10 총선거 포스터에는 ‘기권은 국민의 수치, 투표는 애국민의 의무’라는 표어와 함께 태극기가 실려 있어 선거권 행사를 애국심 차원으로 연결시킨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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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치뤄진 5·10 총선거 당시 제작된 포스터.


국가기록원은 태극기는 구한말 이후 국권회복과 대한독립의 굳은 염원과 결의를 보여주었다고 설명했다. 또 정부수립 이후에는 국경일과 국가행사에 게양되었으며, 올림픽·월드컵 등 국제경기에서 승리의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실제 구한말 의병장 고광순(1848~1907)은 일본군과 싸울때 ‘불원복(不遠復, 조국의 국권을 곧 회복할 것이다)’이라는 글자를 새긴 태극기를 지니고 다니며 조국의 국권 회복을 기원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921년 신년축하식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며 대한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1941년 미국에 있는 한인교포들에게 태극기를 보내며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자’는 요지의 글을 태극기에 써서 보내기도 했다. 윤봉길 의사의 한인애국단 입단 기념촬영에도 태극기는 어김없이 광복을 향한 염원의 상징으로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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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때 태극기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된 목판. |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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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제작된 김구 주석 서명문 태극기.|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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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윤봉길 의사가 태극기 앞에 서서 한인애국단에 입단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국가기록원 제공


광복 이후에도 정부수립 경축식, 3.1절 및 광복절 행사 등 정부의 주요 행사에 태극기가 게양됐고, 경축 시가행진을 할 때에는 맨 선두에 대형 태극기가 등장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우리 국군은 태극기 위에 승전을 다짐하는 글귀를 새기며 조국수호의 의지를 다졌고 서울을 수복했을 때에는 옛 중앙청 건물 앞에 태극기를 게양하며 기쁨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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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FIFA 월드컵 한국과 독일 경기전에서 대형 태극기로 응원하는 한국응원단.|국가기록원 제공


이후 태극기는 올림픽, 아시아경기대회 등 국제경기에서 메달을 획득한 선수의 온몸에 휘감기며 환희의 상징으로 사용됐고 선수들의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한 응원의 도구로도 한 몫을 담당했다.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가로 60m, 세로 40m의 초대형 태극기가 경기장 응원석에 휘날리며 모든 국민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이상진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상징물인 태극기와 관련된 기록을 발굴해 정리하고 국민들께 보여드림으로써, 태극기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나라사랑의 마음을 고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대광 기자 chooho@kyunghyang.com>

[출처]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3&oid=032&aid=0002683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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